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 위안부 (문단 편집) === 관련 자료에 대한 엇갈린 반응 === 한 사료에 관한 해석부터 먼저 소개한다. 2013년 8월 7일에 안병직 교수에 의해 당시 조선인 위안부 관리인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이 일기의 저자는 1942년 부산을 출항한 제4위안단 소속으로서 일기 내용과 제 4위안단에 대한 공식 자료가 일치하는 등 신뢰성이 대단히 높은 자료로 확인되었다. [[http://news.chosun.om/site/data/html_dir/2013/08/07/2013080700246.html?news_Head1|한국측 보도]] [[http://headlines.yahoo.co.jp/hl?a=20130807-00000007-mai-soci|일본측 보도]] 이 자료에 대하여 한국측은 '''위안소의 운영에 대한 군부의 직접적 개입'''에 중점을 두며 사실상 일본군이 전면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것에 해설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 측은 필자가 위안부에게 부탁을 받고 성행위의 대가로 받아 저금한 액수 중 600엔(현재 가치 수천만 원에 해당)을 본국으로 송금하였다고 기술한 내용에 대한 해설과 함께 '''조직적인 위안부 모집활동은 있었으나 거액을 제시한 업자의 모집행위로 인하여 군이 개입하여 모집할 이유는 없었다'''는 안병직 교수의 분석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일보]]판의 보도에는 안병직 교수가 말한 조직적 모집행위가 있었다는 내용만 있고 뒤의 군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부분은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참고로 안병직 교수는 위안부의 약취, 유인에 대한 일본인과 한국인 포주의 개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군의 조직적 개입보다는 '묵인' 내지 '방관'을 주로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인 할당을 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한국측에서는 이 내용을 한국 측이 기존에 주장하였던 일본군의 위안부 조직적 동원에 대한 증거로써 취급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 측에서는 위안부는 거액의 대가를 받은 창녀들이었으며 업자들이 이런 거액을 대가로 여성을 모집하였다는 기존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